이미지의 번역과 읽기 - 우훙의 <미술사 강의> 중에서..

이미지의 번역과 읽기 - 우훙의 <미술사 강의> 중에서.. 獨立閱讀/觀, 바라보기 2009/10/28 19:38
미술사학자 우훙(巫鸿)이 <독서>에 연재한 칼럼이 <미술사 강의>(美术史十议: 삼련,2008)라는 제목으로 묶여 나왔다. 우홍은 현재 시카고대 중국미술사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어로 번역된 책으로 <순간과 영원>, <그림 속의 그림> 등이 있다.

재미삼아 기획해 본 내 나름의 총서에 포함시켰던 책인데, 우연히 번역이 진행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읽다가 흥미로운 몇 구절을 초벌로 조금 번역해 두었는데, 곧 쓸모없어질 모양이다. (어디 들이밀 데도 없고, 머나먼 미래에나 시도해 볼 수 있을) 내 상상의 총서도 이빨이 하나 빠졌다. 능력있는 번역자에 의해 좋은 한국어로 소개된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번역자가 우홍의 책을 하나도 읽지 않은 상태이며 번역을 위해 관련도서들을 참고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여건이 안 되어 보인다는 점이다.. 나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인데, 이해하지 못하는 글을 번역할 수 있는 전문번역가의 능력이 놀랍다. 일반인을 위해 쉽게 풀어 쓴 내용이긴 하지만, 읽기가 아닌 출간을 위한 번역이라면 최소한 그 분야에서 상식적인 부분에 대한 오류는 없었으면 한다..)

내가 재미있게 본 부분은 2장 부분이다.(사실 여기까지만 읽었다.. ㅡㅡ;;) 그림을 읽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는 데 사진이라는 매체가 기여한 역할에 대해 간략하지만 유효적절하게 정리하고 있다. 사진은 그야말로 그 장소에 가야만 볼 수 있었던 작품을, 모아서 분류할 수 있는 자료의 형태로 바꿔 놓았다. 그것이 이미지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해를 위한 번역이었기에 별로 고민하지는 않았지만 애매한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중한사전에는 "중역"으로 나오지만) translation의 역어임에 분명한 "轉譯"를 한국어로 어떻게 옮길 것인가? "전역"이라고 그대로 쓸 수도 없고, 그냥 "번역"이라고 하면 헷갈려 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문장 중 일부 문맥에서는 "번역"이라는 단어가 적절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언어간 번역 뿐 아니라 매체간 번역도 존재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번역"이란 말을 나는 선택하긴 했는데.. (문맥에 따라서는 "전이"가 더 어울릴까?)

우리가 미술 작품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사진 이미지는 사실 자신이 원작과는 다른 예술형식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곤 한다. 이 "번역자"의 능력이 너무 뛰어나 그것이 원래 외국어였다는 사실도 모르게 되어버린 것이다. 번역을 "독자를 저자에게 데려가는" 외국화 번역과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가는" 자국화 번역으로 나눠서 생각할 때, (거칠게 말해) 독자를 저자에게 데려가는 외국화 번역은 정확하되 딱딱하고 생소한 개념이 넘치고 그 반대는 잘 읽히긴 하지만 두루뭉실한 부분이 많다.(혹은 직역/의역의 대립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진에 의한 번역은 조금의 변형도 없이 독자를 저자에게 데려다준다는 착각을 준다.

이러한 착시로 인해 적어도 두 가지 위험성이 상존한다.
첫째,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예술형식을 다른 예술형식으로 전환시킨다. 우훙은 두루마리로 된 그림을 직접 손으로 펼치며 볼 때와 그것을 사진으로 볼 때의 차이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둘째, 미술작품의 전체적인 환경을 선택된 특정 이미지로 압축한다. 돈황석굴에 직접 가서 벽화를 보면, 어두침침한 동굴 속에서 불빛이 닿는 일부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돈황석굴은 건축, 회화, 조각이 어우러진 종합적인 예술이며, 그것의 배치가 보여주는 것은 종교적인 의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진으로 아주 정교한 디테일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곳을 거닐며 느끼게 되는 종교적 공덕쌓기라는 원래 의미는 사라지고 만다.

한 마디로 사진 이미지는 모든 것을 특정한 형식의 시각적 응시의 대상으로 변환시켜 버린다.는 것!

미술사 연구에 있어 사진 이미지의 활용은 양날의 칼이다. 그것은 현대인이 미디어와 맺고 있는 관계와 상당히 흡사하다. 우리는 신문이나 TV를 통해서만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미디어는 결코 객관적인 것이 아니어서 끊임없이 사실을 편집하고 가공하곤 한다. 사진 이미지의 장점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한편 그것이 가진 함정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적으로 돌아봐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근거로 삼는 것이 미술작품 자체인가 아니면 그것의 재현된 영상인가? 우리의 논지전개가 어떻게 이미지의 "번역"에 의해 규정되고 인도되는가?"

2. 도상의 번역(轉譯)과 미술 읽기(釋讀)


최근에 아주 재미있는 논문 한 편을 읽게 되었다. 그 내용은 정신분석학의 대가 프로이트가 행한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해석에 관한 것이었다.(The Art Bulletin, 2006년 3월호) 논문의 저자 메리 버그스타인(Mary Bergstein)의 연구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의 이 명작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1914년에 논문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는 자신을 <구약>의 이 유태 예언가와 비교하기도 하였다.(프로이트 또한 유태인이다.) 프로이트의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논점은 <모세상>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이 조각상이 표현하는 것은 <성경>의 어느 장면인가? 돌에 새겨진 이 모세는 어떠한 정신 상태에 처해 있는가? 그의 동작과 표정의 의미는 또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프로이트의 대답은 정신분석학자의 독특한 견해를 잘 보여줬을 뿐 아니라 미술사 연구의 역사적 전환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약·출애굽기>의 기록에 따르면, 모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켰다. 하나님이 그에게 "십계"가 새겨진 석판을 주었는데, 그 첫 번째 계율은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만드는 것을 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석판을 들고 시나이 산을 내려올 때 그가 목격한 것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인들이 황금 송아지를 주조하여 미친 듯이 숭배하는 광경이었다. 너무나 화가 난 모세는 석판을 던져 깨뜨려 버린다. 19세기 유럽 미술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이 표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모세의 머리가 격하게 왼쪽으로 틀어져 있는데 그것은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이스라엘인을 노려보는 것이다. 냉혹한 표정은 내면의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비록 앉아 있긴 하지만 상체가 꼿꼿하고 다리 한쪽은 앞으로 펴져 있고 다른 쪽 다리는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 마치 흥분을 못 이겨 급하게 일어서려는 것처럼 보인다. 석판을 깨뜨리는 순간이 이에 뒤따라 일어날 것만 같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다르게 봤다. 비록 누구나 알고 있는 <성경> 이야기가 <모세상>에 대체적인 서사 내용을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미켈란젤로가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구약>에서 문자로 명확히 기술하지 못한 미묘한 심리 활동이었다는 것이다. 석판이 모세의 손에서 미끄러지려는 순간 이 유태인 성자는 이미 사실상 내면의 분노를 제어하였다. 프로이트의 이러한 견해는 조각상의 어떤 디테일에 대한 관찰과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모세의 오른손 동작 ― 손을 가슴으로 끌어당기고, 손가락은 곱슬한 수염에 끼워 넣어 분노를 가라앉히고 있는 ― 이 반영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끓고 있는 내면에 대한 단속이지 격렬한 정서를 외부로 분출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세상>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따라서 강렬한 자기 통제력을 갖춘 인류의 지도자이지 위협적인 힘으로 동족을 억누르는 반신(半神)이 아닌 것이다.


버그스타인은 그녀의 논문에서 20세기 초 유럽의 정치적 형세 및 프로이트 자신의 유태 콤플렉스와 인문학적 관심 등 여러 방면과 관련 지어 프로이트의 <모세상>에 대한 견해를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연구가 가져다 준 가장 뜻밖의 발견이자 이 글과 가장 관련된 논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프로이트의 해석은 사실 조각상 사진에 기반한 것이지 현장에서 실물을 보면서 행한 것이 아니었다. 버그스타인이 이렇게 주장한 근거는 프로이트의 글에 첨부된 아마도 자신이 직접 그린 스케치(이스라엘인이 황금 송아지를 숭배하는 모습을 본 후 모세가 보여준 일련의 반응을 표현한 그림이다)의 저본이 프라텔리 알리나리(Fratelli Alinari)가 1880년 전후에 촬영하여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널리 퍼져 있던 <모세상> 사진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다른 증거를 들어 프로이트가 이 조각상을 연구할 때 사진을 사용했음이 분명하며,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조각상의 세부를 찍어 오도록 부탁하기도 했다는 점을 증명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프로이트가 그렇게 한 이유는 그가 직접 현장에 가서 연구할 수 없어 사진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실제상황에 부합되지 않는데, 그가 이 글을 쓸 때 로마에 머물고 있었고,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에 위치한 이 저명한 조각상을 수없이 참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는 왜 반드시 사진을 사용해야만 했을까? 이것이 바로 이 짧은 글에서 논의하려고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즉 현대미술사에서의 묘사와 해석은 종종 원래의 작품에 대한 사진의 "번역"에 근거하고 있으며, 미술사가의 사진에 대한 의존은 사실상 그들이 미술 작품을 해독하는 선결조건이 되었다는 점이다.


프로이트가 20세기 초 <모세상>에 대한 논문을 쓸 때 미술사는 마침 일반적인 예술 감상과 골동품 애호가의 한가로운 취미에서 근대적 인문학과의 하나로 전환되는 과정에 있었다. 이러한 "과학화"의 과정은 촬영술의 발명과 보급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사실상 우리는 사진이 미술사의 운행방식을 본질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료의 수집에서 뿐 아니라 분석 방법에서도 사진(및 이후의 슬라이드와 디지털 영상)은 일종의 중간 매개체의 역할을 하였다. 상이한 매재, 형식, 크기의 미술품이 통일된 모습으로 도서관과 이미지 데이터베이스에 보존되고 분류될 수 있는 영상으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번역은 미술사가가 점유할 수 있는 자료의 범위와 능력을 크게 확장시켰다. 그것은 연구자가 집안에 앉아 대량의 자료를 분석하고, 게다가 보통은 볼 수 없거나 보기 힘든 형상을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항공 촬영으로 찍은 도시와 건축 사진, 수천 킬로 바깥의 고고학적 발굴현장 및 매장된 역사적 유물 등이 좋은 예이다. 미술 연구에 있어 사진자료의 쓰임이 이토록 분명했기에 일부 학자들은 촬영술이 발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벌써 이미지 아카이브의 설립을 건의하기까지 하였다. 예를 들어 1851년에 이미 이탈리아 르네상스 3대가의 하나인 라파엘로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사진으로 정리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8년 후 미국 작가 올리버 홈즈(Oliver W. Holmes, 1809-1894)는 장래에 사진 이미지가 서적처럼 도서관에 가득하여 예술가, 학자, 애호가들이 폭넓게 이용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최근 로버트 넬슨(Robert S. Nelson)은 환등기를 활용한 수업과 미술사 연구의 관계를 다룬 훌륭한 논문에서 홈즈의 예언이 디지털 기술의 발명으로 인해 결국 실현되었음을 지적했다.(Critical Inquiry, 26기, 2000)


그러나 미술사에 대한 사진의 영향은 자료 제공에 그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렇게 "번역된" 재료의 사용이 세 가지 중요한 방면에서 미술사의 기본적인 사유방식을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첫째는 "비교"식 논증방식의 성행이다. 19세기 후반부터 미술사 연구와 교학에서 도상의 비교는 점점 논지전개의 기본이 되어 갔다. 어떤 작품에 대해 전문적인 실지 관찰을 하기보다 서재나 교실에서 사진의 차이를 판별하는 것에 미술사가들은 점점 익숙해져 갔다. 이러한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성당,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상처럼 현실에서 공존할 수 없는 대상이다. 이 새로운 연구방법은 그 시기의 몇몇 중요한 미술사 이론의 출현을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스위스 학자 하인리히 뵐플린(Heinrigh Wölfflin; 1864-1945)은 현대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그는 르네상스 전성기와 17세기 예술의 비교를 통해 "예술표현의 보편적 형식"을 도출했다. 그는 형식의 전환이 모든 예술전통의 발전에 내재적 규율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뿐 아니라 뵐플린은 가장 적극적으로 사진의 사용을 주장한 미술사가의 한 사람이며, 미술사 교학에 두 대의 환등기를 동시에 사용한 최초의 교수로 공인되고 있다. 그는 1931년 이러한 교수법의 장점을 설명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강사가 세부, 확대, 변형체 등 각종 다양한 이미지를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어 작품의 형식을 더욱 깊이 있게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강의 방식은 이후 미술사 교학의 정통이 되었다. 넬슨은 이것이 미술사 교학에 있어 "언어적 기초"에서 "시각적 기초"로의 중요한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슬라이드는 주장의 증거를 제공할 뿐 아니라 해석의 구조를 결정하여 지식 생산에 있어 주도적인 요소가 되었다.


"언어"에서 "시각"으로의 전환은 또한 "공간"에서 "시각"으로의 전환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진이 미술상 사유를 변화시킨 두 번째 중요한 요소이다. 복잡한 건축물과 삼차원적 예술품이 이차원의 이미지로 재현될 때, 사진이나 환등이 연구와 교학의 주요한 재료가 될, "시각"은 연구자와 미술품 사이의 유일한 연결망이 된다. 만약 어떤 건물을 참관할 때 사람들은 연속된 공간을 뚫고 지나가야 하며, 조각상을 감상할 때 왔다갔다 하면서 끊임없이 시점을 옮겨 다녀야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신체의 이동이 사진이나 환등을 볼 때는 불필요하게 된다. 특히 환등을 보며 강연을 들을 때 청중들은 컴컴한 강당에 앉아 해설을 들으면서 확대되거나 특수한 조명을 가미한 이미지를 보게 된다. 그들과 예술의 관계는 "응시"(gaze)의 활동으로 축소된다. 그들이 주시하는 대상은 원래의 건축이나 문화적 환경에서 분열되고 해체되어 나온 파편이다.


"파편"의 개념은 사진이 미술 연구에 미친 세 번째 심층적인 영향과 관련된다. 연구자의 날로 증가하는 "디테일"에 대한 관심이 그것이다. 만약 19세기 초반의 미술연구가 여전히 미술품에 대한 막연한 인상과 거시적인 미학적 평가에 근거하고 있었다면, 19세기 후반 이후의 미술연구는 "의미 있는 세부"의 선택과 해석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경향은 진위의 감정, 시대와 작가의 확정, 스타일 분석, 도상학(iconography) 연구 등 여러 미술사 영역 전반에 걸쳐 주류가 되었다. 연구자의 기본기술은 미술품의 디테일에 대한 탐색과 해설을 통해 어떤 결론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 디테일의 가장 훌륭한 원천으로 사진만한 게 없었다. 실제로 우리는 미술사 사진자료의 가장 큰 역할이 디테일의 제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의 유명한 작품이 수십 개에서 수백 개에 달하는 세부로 분해되곤 한다. 연구자들은 이 때문에 어떤 그림의 미묘한 붓놀림이나 건축물의 국부적인 장식 도안에 대해 세밀하게 관찰하여 역사적 심미적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독일 미술사가 안톤 슈프링거(Anton Springer; 1825-1891)를 위시한 몇몇 19세기 유럽학자들은 바로 이 때문에 사진술을 "미술사 연구의 현미경"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연구자들이 주관적인 억측에서 벗어나 그들의 연구를 더욱 정밀한 것으로 발전시켜 "과학"인 층위로 진입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해 주었다.



프로이트의 <모세상> 연구로 되돌아오면, 우리는 이제 왜 프로이트가 사진을 직접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야 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베드로 대성당에서 이 조각상을 참관할 때의 현장경험을 기술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거기서 느낀 것은 고독함과 무력감이었다. 모세는 마치 분노한 것처럼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마치 신앙을 잃고 우상숭배에 빠진 군중들의 일원인 듯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이 그에게 학자의 자신감을 되찾아 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사진 이미지를 통해 "쓰레기 더미 같은 일상적인 관찰에서 주의하지 못한 특징" 냉정하게 발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찾은 증거 --- 모세가 자신의 수염을....



딱 여기까지 읽다가 멈추었으며, 이 초벌번역을 다듬거나 이어지는 다음 문장을 번역할 계획은 없음. ^^;;

Posted by 若書
1  ... 27 28 29 30 31 32 33 34 35  ... 193 
하단 사이드바 열기

BLOG main image